이방인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다
엄마의 죽움
장례식
울지 않다
담배를 피다
마리와 해변가로
레몽과
세레스와
바닷가
아랍인
햇볕이 뜨겁다
덥다
아랍인의 손에 든 칼날이 햇볕에 빛나다
볼 수 없다
권총
살인
재판
엄마의 죽음
울지 않다
담배를 피다
일상의 생활
고의
할말없다
나와 무관하다
햇볕이 뜨거웠다
요양원에서 사라들이 증언하다
마리가 증언하다
나는 나의 재판에서
나는 살인을 했다
고의가 아니다
엄마의 장례식일이 등장하다
나의 살인과 관계없는 일들이 전개되다
그리고
나는 나의 재판에서
이방인이 되다
사형
신부님 면회거절
단두대를 생각하다
하늘을 보다
하늘을 보고
소리를 듣고
새벽을 기다리고
신부님의 방문
나와 무관한 사람들
나와 무관한 사실들
내가 믿지 않는 신앙
..
***
알베르 까뮈는 나에게는 미지의 동경인이다. 까뮈라는 단어에 좋아하고 전율한다.
그의 소설을 깊이 새겨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아뜩한 기억속에서
나는 다시 알베를 까뮈의 대표작품 <이방인>을 읽었다.
엄마의 죽음, 그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뫼르소를 이해한다
우리는 친한 가족의 죽음앞에서 그를 잃어버린 슬픔의 몫보다는 훨씬
많은 나의 몫 때문에 운다. 어떻게 사나, 어떻게 하나,..
그의 죽음이 가슴에 오랫동안 잔잔히 그리움으로 묻어 있는 것이
일상의 진실된 모습이 아닌가 싶다.
뫼르소는 그랬다. 요양원에 엄마를 보내고 무턱대고 눈물만 흘리던 그 시절을 넘기고
이젠 마냥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이 싫어 요양원에 엄마를 보러가지 않았다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전보가 왔을때, 까뮈는 그것을 슬프다고 표현하는 대신에
'어제, 오늘이던가 엄마가 죽었다'라고 표현한다.
엄마에게 무심해서 그랬을까. 우리는 실상 많은 것에 무심하다. 무덤덤해진다..
엄마를 보겠다는 요양원관계자 말에 싫다고 한다.
우리가 죽은 자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과 진정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사람의 죽음을 확인하면서, 자기 감정에 빠진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자기 연민에 가깝다.
뫼르소는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굳이 엄마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도,
자기 마음을 굳이 틀리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그 뿐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상의 생활과 다름없는 일상을 보낸 뫼르소.
그는 위선을 보이지 않고 다만 자기 감정과 느낌대로 행동했다.
아니, 그는 특별한 감정과 느낌이 없었다. 그냥 일상의 삶을 보냈을 뿐이다.
마리라는 여인과 만나 해변가에서 정사를 벌인 일은 그냥 보통의 남여 사이에
있었던 평범한 일이었다. 우연찮게 친구 때문에 아랍인과 몸싸움을 벌이고
친구가 자기에게 맡겼던 권청이 주머니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손으로 권총의 감각을 느꼈다.
뫼르소가 느낀 것은 찌는 더위, 뜨거운 햇볕, 더위와 햇볕으로부터 그를
구원해주는 바다였다.
날은 너무 더웠고 햇볕은 너무 뜨거웠다. 조금 전 몸싸움했던 아랍인의 손에 있던 칼이
햇볕을 받아 반사되었을 때, 그는 더웠고 햇볕으로 뜨거웠고. 그 뜨거움에 번쩍이는 칼의
반사빛은 그냥 그 순간 그에게 위협이였을 뿐이다. 그는 특별한 공포없이, 담담하게
그러나 칼날의 빛때문에 그는 권청을 쏘았다. 그것은 그의 장난이 아니었다.
살인의 의도가 굳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햇볕과 그 빛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
칼날의 빛이 저쪽에 어렴풋이 점점 가까이 오는 느낌. 그 순간 그는 자기 방어를 한 것이다.
뫼르소는 자기 죄를 안다.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안다. 그는 그런 상황에서 우발적인 살인을
한 것이다.
재판이 벌어졌을 때, 그는 그의 죄를 인정했고 그 죄만큼의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그 뜨거운 태양아래 바다로 들어가는 자유가 그리운 순간들이
감방에 들어가면서 느껴졌다.
그것이 그에게는 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안다. 습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위로가 되는 것인지. 그는 이미 감방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져서 바깥 세상이 절실히 그립지 않았다. 그는 무감각하다. 그는 그냥
있을 뿐이다. 벽을 보면서, 감방안을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알게 되고
그것은 감방이 이젠 감방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그가 치를 죄값만을 기대했다.
그런데 재판은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흐른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르지 않은 일이 그가 저지른 살인으로 열린 재판에서 주된 화제가
된다. 증인들은 그가 어떻게 살인을 하게되었냐에 초점이 맞춰져서 세워지기 보다는
그가 엄마의 장례식에 어떤 모습을 취했냐를 중심으로 진술하도록 진행된다.
뫼르소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엄마의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관련없는 외형으로 뫼르소는 파렴치한이 된다.
그가 평소에 성실한 회사원이었던 것이 교활한 살인자로 인식되는데 작용하단.
그가 나눴던 여자와의 관계는 문란한 사생활로 둔갑해버린다.
그는 굳이 자기의 죄가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래도 이야기 할 뿐이다.
그러나 재판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두고 진행되지 않고
전후사정을 유추하고 그의 고의적 살인을 단정해버리고
모두는 그 단정에 공범이 된다.
그는 사형이다.
왜 말하지 않는가. 굳이 할 이 없어서요.
왜 신부의 면회를 거절했는가. 그에게 굳이 할말이나 들을 말이 있지 않기 때문에요.
신을 믿어라, 나는 믿지 않는다. 그것은 너의 믿음이다. 그러나 굳이 너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삶은 부조리다. 건너의 삶이 나랑 무슨 상관인가.
마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고 있든 지금 나와는 상관이 없다.
내가 상고를 하고 내가 특사를 기대하고 내가 탈옥 성공을 꿈꾸어서
나를 절망하게 하지 않으리라. 나는 그 유혹에 결코 빠지지 않으리라.
사랑들의 숙명이 나랑 무슨 상관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하는 사람들도 하나의 숙명만을 택하도록 되어 있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다.
그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방인을 쓴 알베르 까뮈는 작가가 아닌 신화의 창조자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