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나비와 전사

하늘처럼1 2013. 1. 27. 14:09

나비와 전사

 

-고미숙-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출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나비와 전사의 책 제목이 의마하는 것이 위의 문장이다

 

고미숙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환 시공간>을 통해서 박지원과 나를 가까이하게 해준

장본인이다.

내가 열하일기만을 읽었으면 못 느꼈을 것을 고미숙선생이 다리를 놔 준 셈이다.

 

그런 고미숙의 책이라 집어 들게 된 <나비와 전사>는 감성과 지성을 함께 아우른 책이다.

 

미국의 "이타카"에서 연암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졋다는 고미숙의 서문은 이렇다

 

"자기를 배려하는 임이 흘러넘쳐야 비로소 타인을 배려할 수 있다"

 

"마음이 통하면 천 리를 지척이라고, 보이지 않는 인연의 선들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광대한 시공간도 단숨에 주파할 수 있다는 것"

 

이타카 숲에서 고미숙이  느낀 거다..

아니 그의 모습은 이미 존재하였으나

나는 그의 모습을 <나비와 전사>에서 보게 된 것이다.

 

고미숙은 나비와 전사를 통해서 '앎과 혁명'을 다시 구성하는 길 위에 설 수 있었다고 한다

 

천지가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나

끊임없이 새롭고,

일월이 아무리 오래되었다고 하나

빛은 날마다 새롭다.....

썩은 흙에서 지초가 돋으며,

썩은 풀에서 반딧불이 생긴다.

 

-박시원<초정집서>

 

내가 주고 받은 숱한 메일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을까.

컴퓨터? 허공에? 사차원공간에 ?

하는 질문..

정말 어디에 저장되어 있을까

 

"별은 수억 광년을 달려와야만 우리를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별의 아득한 '과거'다"

 

라는 말이 위로가 되는 때이다. 새삼스럽다.

 

뫼비우스의 띠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므로

 

'깨달으면 지금 좋고, 미래만 좋은 게 아니라 과거까지 좋아진다."

 

기차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자신이 열어젗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던 셈이다

 

고미숙은 시간과 공간의 분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시간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 한다

어찌 시간이 째짝째깍 움직이는 시간에 의해 같아지는가 그것은 아니란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고통에 빠진 사람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고 정의한다

 

또, 과거의 마차가 공간을 분할하지 않았는데

기차는 목적리로 가는 시간을 단축시키면서 외부와 접촉할 시간을 앗아갔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공간과 시간으로부터 단절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차는 대표적으로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민족주의 또한, 불행하게도 제국주의와 같이 탄생하엿다고 한다.

민족주의는 자국민과 타국민을 분할하면서 공감을 단절시키고

시야를 좁히는 역할을 하면서

정치적인 이점으로 작용하는 도구로 쓰였다고 한다

 

밤은 음기가 작용하는 시간이고,

음기가 충전되지 않으면 낮의 기운인 양기도 제대로 작용할 수 없다

또 밤이야마로 인간이 우주와 영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밤ㅂ의 실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명확해진다

그것은 자연과의 단절을 표상하는 것이다

 

진화론

 

진화로는 정신의 지축을 뒤흔들면서 다가왔다.

진화론이 기독교에 엄청나게 파문을 일으킬 것 같았지만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진화론은 기독교와 충돌하지 안항ㅆ다

충돌은 커녕 문명의 진보는 창조주인 야훼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멋지게 손을 잡았다.

참, 소박하다고 해야 할지 심오하다고 해야 할지

 

실제 근대성은 허다한 '이율배반'을 그 안에 품고 있다.

이성을 트레이트 마크로 내세웠지만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땐

황당할 정도로 '반이성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진화론과 기독교의 타협은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근대 이전에 '제의'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뒤섞인 것이다

비시간적 세계와 시간적 시계 사이에 있는 비대칭성을 가로질러 두 세계가 조화롭게

공존하게 하고자 하는 행위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의 모든 생명을 다 창조해 놓고는 인간 이외의 생명체는 모조리 희생양으로 삼는다면,

그때 창조의 의미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 '지독한 사랑'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

 

고미숙읜 변강쇠와 옹녀를 통해서 자기되기를 고찰한다.

그들의 주체할 수 없는 끊없는 성적 욕망은 타인이나 사회를 의식하지 않는

자기되기라는 것이다

 

변강쇠전에서 '옹녀'는 변강쇠가 죽으면서 지탄을 받아서 죽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자기발견을 위해서 사라지는 것이 자기되는 것의 마땅한 일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18세기 조선의 어던 마을의 노처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처녀는 '일신이 갖은 병신'이라고 소개하면서..

그녀의 탄식을 들려준다

 

'내 얼굴 얽다 마소 얽은 구멍에 슬기 들고

한편 눈은 멀었으나 한편 눈은 밝아 있네

바늘귀를 능히 꿰니 버선볼을 못 박으며

귀먹다 나무라나 크게하면 알아듣고

천둥소리 능히 듣네

오른손으로 밥 먹으리 왼손하여 무엇 할꼬

왼편 다리 병신이나 뒷간 출입 능히 하고

엉덩뼈가 너르기는 해산 잘할 장본이요

목이 비롬 옴쳤으나 만져보면 없을쏜가

내 본시 총명키로 기역자 나냐자를 십 년 만에 깨쳐내니

효행록 열녀전을 무수히 숙독하매 모를 행실 바이 없고

중인이 모인 곳에 방귀 뀌어 본 일 없고

밥주걱 엎어놓아 이를 죽여본 일 없네

장독뚜껑 벗겨내어 뒷물 그릇 한 일 없고

양치대를 집어내어 추목하여 본 일 없네"

 

이런 그녀가 제일 일등신랑감을 점지하여 혼인을 치르고

남편사랑 듬뿍받으니

 

..

<노쳐녀가> 조선후기 가사.. 고미숙 소개-286쪽

 

여성되기다

그녀의 장애가 결핍이 아닌 것이다

고미숙은 말한다. 어떤 대상과도 접속할 수 있고 끊임없이 자기로부터

떠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유머러스한 신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

 

병리학

근대 의료원의 설림도 제국주의와 함게 왔다고 한다

우리 고유의 한의학이 몸의 기운, 어디 하나도 단절되지 않은

신체의 기의 흐름을 이야기하는데 반해

서양 의학은 그 부분에 대한 해결책만으로 치유한다고 한다.

 

삼각산아 물어보자 콜레라가 발생하매 죽는 수를 비교컨대

한인들이 더 많으니 그것 무슨 곡절인가

위생예방하는 것도 다소 관계 있지마는

어떤 병을 물론하고 지옥 같은 피병원에 한번 잡혀가고 보면

죽고마는 까닭이지 <대한매일심보>' 시사평론'',1909년 9월 25일자.. .......책 361쪽

 

현대는 의학이 발달하여 생명이 많이 연장된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는 글이다

 

 '나는 나의 재스민 화단 밑에 나를 묻어달라고 부탁하였고,

나는 그곳에 묻일 것이며, 분해된 이 육체에서 발산되는 원자들이

영양을 제공하여 내가 가장 좋아했던

그 꽃들의 봉오리를 탐스럽게 맺도록 해줄 거예요

다음 해 그대가 이 꽃향기를 맡을 때, 그대는 그 향기 속에서 옛 친구의 영혼을 호흡하게

될 거예요. 그 꽃들은 그대 뇌수의 갈피에 스며들어 그대에게

재미있는 상념을 제공하며 다시 내 생각이 나도록 해줄 거예요.'

 

악명높은 사드의 말이랜다. 그의 묘비명에 단 한 글 '살았노라'가 있댄다.

 

고미숙은 이 사드가 온갖 삶의 모습이 생성과 소멸에 불과하므로 죽음 역시 삶처럼

여겼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 매료당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역사는 늘 구비마다 경이로운 역설을 마련대둔다

 

세계를 구성하는 건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 차이들의 역동적인 공존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우발성일 뿐이다

 

'주름'들의 뒤엉킴

 

하나의 발견이 동시에 여러명의 과학자에게 발견되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앏은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에 가뜩한 사람에 의해 체취되는 것이 앎이라고 고미숙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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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에 관한 야그는 이쯤에서 멈추어야겠다

뜻하지 않은 좋은 문장, 생각지 못했던 사고..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만난 사건들이다